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화도 회군 (문단 편집) ==== <사불가론>에 대한 최영의 반론 ==== 최영은 이성계의 <사불가론>에 맞서 3가지 근거를 들어 반박했다고 한다. > 1. 명나라가 대국이긴 하지만 북원과의 전쟁으로 요동 방비는 허술하다. > 1. 요동을 공격하면 가을에도 경작이 가능하기에 군량 확보가 가능하다. > 1. 장마철이라는 조건은 명나라도 같으며, 명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에 싸우는 걸 더 싫어한다. > + 왜구는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. 이 중, 대다수는 오늘날까지 요동 정벌의 가능성을 논할 때, 그리고 <사불가론>의 당위성을 논할 때 많이 사용되는 근거들이다. 책에 따라서는 3가지 혹은 4가지를 최영이 이성계에게 말했다고 나온다. 일단 [[http://kookbang.dema.mil.kr/newsWeb/20161020/1/BBSMSTR_000000010433/view.do|<국방일보>]]나 [[http://www.goodnewspeople.com/read.php3?aid=13642669917014013|이런 기사]]에서나 [[https://books.google.co.kr/books?id=HI1gBQAAQBAJ&pg=PT34&lpg=PT34&dq=%EC%B5%9C%EC%98%81+%EB%B6%81%EC%9B%90%EA%B3%BC%EC%9D%98+%EC%A0%84%EC%9F%81+%EC%9A%94%EB%8F%99&source=bl&ots=a3OFLQywek&sig=3dKGS4SJD0j_n6dtAgTNjxrSRaI&hl=ko&sa=X&ved=0ahUKEwijkdeXi6TTAhXCTLwKHaIbDK44ChDoAQggMAA#v=onepage&q=%EC%B5%9C%EC%98%81%20%EB%B6%81%EC%9B%90%EA%B3%BC%EC%9D%98%20%EC%A0%84%EC%9F%81%20%EC%9A%94%EB%8F%99&f=false|이런 책]]에서 언급되고 있는 걸 보면 아예 순수 창작은 아닌 듯하나, 《고려사》 데이터베이스에서 그 부분을 찾기 어렵다. 아직 번역이 안 된 부분이 남아서 그런건지, 최영의 저 주장들이 후세에 덧붙여진 이야기인지 명확하게 확인이 필요하다. 하지만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최영의 논박은 이성계의 논리를 반박하기엔 부족해보인다. 1은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넘어간다고 쳐도[* 어디까지나 '그럴 수도 있다'는 것이지 실제 가능성은 매우 낮다. 명나라가 북방지역에서 별 다른 군사활동을 하지 않던 것도 아니고, 오히려 나하추고 북원이고 철저히 정리한 후에 본격적으로 고려에게 대놓고 땅내놓으라고 난리친 것인데 그 정도의 군사적 대비를 안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. 이 시기의 명나라보다 몇배는 상태가 안좋았던 원나라의 동녕부에 대한 공세도 식량 창고 하나 태워먹자마자 실패로 끝났다.] 2의 경우는 1이 아닐 시에는 요동 점령이 오래 걸릴 수 있고[* 설령 점령에 성공한다 해도 전쟁은 경작지를 개박살내기 딱 좋은 짓거리다. 역사적으로 점령지에서 경작물을 추수해 보급을 충당한 사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. 사실 경작이라는 단어가 그럴 듯해서 넘어가는 것이지 이거 '''약탈로 보급한다'''는 소리이다. 과연 요동인들이 자기들 먹을 곡식을 털어가는 고려군에게 협조적일까?] 3의 경우엔 조건 자체가 같다는 부분은 맞을지 몰라도 명나라 군대가 장마철에 싸우는 걸 더 싫어한다는 근거는 미약하다.[* 북방 출신 병사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으나, 명군의 주력은 강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습한 기후에는 고려인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았다.] 여기에 [[왜구]]가 정규군이 아니므로 국가의 존망을 위협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건 당시 상황에서는 일부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지만[* 왜구 따로 정규군 따로가 아니고 왜구가 편성되면 곧 정규군이었다. 오히려 징발된 농민들 같은 일반인들에 비해 살상을 일삼는 왜구는 그 잔학성으로 악명이 높았다.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계기들 중에 하나가 왜구 소탕을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. 또한 여말의 일본은 [[남북조시대(일본)|남북조 시대]]로서 두 가문의 [[천황]]이 양립해 대립하여 중앙이 몹시 어수선해서 변방의 왜구가 제대로 통제되지도 않았다.] [[고려 말 왜구의 침입|불과 몇년 전만 해도 고려를 수십 년간 초토화시키면서 수도 개경 근처까지 진격한 이들이 바로 왜구 세력들이었다.]] 게다가 사불가론으로 논쟁이 벌어질 당시에도 [[왜구]]가 연이은 패배로 인해 기가 좀 죽긴 했어도 위협은 여전했다. 왜구의 날뜀이 진정된 건 조선이 건국되고도 근 30년이 더 지난 뒤인 세종 대부터였다. 물론 백성의 위해는 감안하지 않고 단지 나라의 존망에 위협이 되느냐로 따지면 단지 주의만 해야 할 수준이라는 항변도 가능하겠지만, '''요동 공격에 고려 전군을 몰아넣어야 한다는''' 점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